배미향의 저녁스케치배미향의 저녁스케치

2023/03/28 <우리 다시 만나요>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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CBS Radio 음악FM 93.9MHz 매일 18:00~20:00

얼마 전 메일을 하나 보냈습니다. 수신인은 예전에 시드니에서 근무할 때 저의 상사였던 미세스 로다 (Mrs. Rhoda). 특별한 용건은 아니고 그냥 안부메일 이었는데 내용은 아주 평이했습니다. "미세스 로다, 건강하시죠? 저는 잘 지냅니다. 요즘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. 사는 게 마치 드라마나 연극 같다는 생각도 간혹 듭니다. 문득 시드니에서 살던 시절과 모습들이 떠올라 소식을 전합니다. "메일을 보낸 지 한 달쯤 지나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답장이 왔습니다. "미스터 정이 호주를 떠난 지 이십년이 넘었군요. 생각을 많이 한다는 것은 깊어간다는 뜻이며, 미스터 정은 잘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. 늙어서인지 나는 여기저기 아픈 곳도 생기고 힘이 들지만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행복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. 언제 볼 날이 있겠지요? 그 때 우리 다시 만나요." 답신 메일을 읽다보니 이십년 전 호주를 떠나기 전날 저녁 주름진 손으로 내 손을 잡으며 돋보기안경 너머 따뜻한 회갈색 눈빛으로 미세스 로다가 나에게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. "한국에 가서 잘 지내요. 그리고, 우리 다시 만나요. 잘 지내다 보면 오페라 하우스가 내려다보이는 이 카페에서 오늘처럼 차 한 잔 나눌 날이 오겠지요." 미세스 로다 에게 메일을 보냈던 것처럼 저는 가끔 기억 속의 사람들을 떠올립니다. 그런데 그들도 저를 기억하고 있을까? 하는 생각도 듭니다. 사람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 중에 하나가 기억의 상실이라고 하잖아요. 나이를 먹어가며 어쩔 수 없이 기억이 약해지다가 결국엔 자기의 이름도, 가족도 알아보지 못하고 아이들처럼 하하거리다가 본능만을 남긴 채 백지처럼 하예 진 상태로 돌아가는 모습…'우리 다시 만나요' 는 이런 망각의 처연함에서 옛날 기억들을 다시 꺼내주는 말이고, 비록 겨자씨만큼 작은 가능성 이나마 새로운 기억을 다시 만들자는 약속의 말이겠지요. 물론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지켜지지 않은 약속은 깨어진 게 아니라 단지 미완일 뿐이지요. 그리고 '다시 만나요' 라는 말을 나누는 순간 우리는 서로의 기억 속에 되살아나는 거겠지요?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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배미향의 저녁스케치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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