배미향의 저녁스케치배미향의 저녁스케치

2023/01/31 <처음이자 마지막 외식>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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CBS Radio 음악FM 93.9MHz 매일 18:00~20:00

제가 열 살도 되기 전. 그 날의 기억을 이리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 날이 저와 아버지가 손을 잡아 본 것도, 단 둘이 외식이라는 것을 해본 것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기 때문입니다. 눈이 하얗게 쌓인 겨울. 아버지와 저는 웅천이라는 작은 기차역에 내렸습니다. 철공소를 하던 아버지는 그날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외상값을 받기 위해 가신 거였습니다. 나를 데리고 가신 이유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외상값을 꼭 받아오라는 어머니의 성화 때문이었습니다. 기차역에 내린 뒤로는 어디에 가서 누구를 만났는지 외상값은 받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. 그렇게 끊긴 기억은 어둑해질 무렵, 웅천역 앞의 한 허름한 식당 앞에서 다시 시작됩니다. 식당 안은 너무 따뜻했습니다. 그리고 냄새로 봐서 고기를 파는 식당이었고 그 순간 아버지는 외상값을 받는데 성공하셨을 거라는 안도감이 어린 저의 마음에도 들었습니다. 잠시 후 우리 앞에 놓인 음식은 먹어 본 적도, 본 적도 없는 음식이었습니다. 고기가 달고 부드러웠습니다. 게다가 고기가 익으면서 나오는 국물에 밥을 비벼 먹으면 정말 환상적이라고 기억될 만큼 그 음식은 저에게 충격적이었습니다. 그 뒤로 그 음식을 먹어 보지 못했습니다. 대학에 다니던 어느 날 우연히 들른 학교 앞 기사식당에서 그 음식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이름조차 몰랐습니다. 그 음식은 바로 돼지 불 백이었습니다. 지금이야 직접 만들어 먹기에도 어려움이 없는 음식이지만 그 당시에는 그 이름을 아는데 만도 십 수 년이 걸린 셈이죠. 따뜻한 말 한마디 나눈 기억도 별로 없는 아버지의 손을 잡은 날이었고 성공적으로 외상값도 수금한 날이었고 본 적도 먹어 본 적도 없는 달짝지근한 음식으로 인생의 첫 외식을 한 날이니 얼마나 기억이 선명할까요? 누구에겐 맛으로, 누구에겐 냄새로 기억되는 추억의 음식. 저에게 돼지 불 백은 흰 눈과, 어슴프레한 초저녁, 그리고 아버지의 굵고 거친 손과, 달큰하고 뽀얀 고기의 맛으로 기억되는 음식입니다. 유난히 지친 마음의 요즘. 오늘 저녁은 이렇게 추억이 진하게 밴 음식으로 위로 받아야겠습니다.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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배미향의 저녁스케치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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